기무라 에이이치 1906~1981 일본의 중국 철학자다. 교토에서 태어났으며, 1930년 교토제국대학(京都帝國大學) 문학부 중국철학사학과를 졸업했다. 1960년 〈노자의 새로운 연구〉로 박사 학위를 받았다. 교토대학 조교수를 거쳐 1949년부터 오사카대학(大阪大學) 문학부에서 학생을 가르쳤으며, 1967년 정년퇴임 후 명예교수를 지냈다. 오테몬가쿠인대학(追手門學院大學) 교수를 역임하기도 했다. 제6절 〈옹야〉편의 성격과 구조 제7절 〈술이〉편의 성격과 구조 제8절 〈태백〉편의 성격과 구조 제9절 〈자한〉편의 성격과 구조 제10절 〈향당〉편의 성격과 구조 제11절 〈선진〉편의 성격과 구조 제12절 〈안연〉편의 성격과 구조 제13절 〈자로〉편의 성격과 구조 제14절 〈헌문〉편의 성격과 구조 제15절 〈위령공〉편의 성격과 구조 제16절 〈계씨〉편의 성격과 구조 제17절 〈양화〉편의 성격과 구조 제18절 〈미자〉편의 성격과 구조 제19절 〈자장〉편의 성격과 구조 제20절 〈요왈〉편의 성격과 구조 제5장 《논어》의 편집
한글 번역본 참고문헌 옮긴이의 글 찾아보기 출판사 서평 이 책은 크게 공자의 전기와 《논어》를 다루고 있다. 다시 말해 중국 사상사와 문화사 연구에서 공자의 존재를 무시할 수 없다면, 공자의 언행록인 《논어》를 깊이 연구해 밝힐 필요가 있다는 의미일 것이다. 따라서 이 책에서 다루는 공자의 생애와 《논어》의 내용을 개관해보려 한다.
공자의 전기
공자는 지금으로부터 약 2500년 전인 기원전 6세기에서 기원전 5세기에 걸쳐서 73~74세의 생애를 살았다. 당시 중국은 고대 봉건 국가인 주(周)왕국이 붕괴하던 시기로 이른바 춘추 시대 말기에 해당한다. 즉 공자 시대에 중국 전통의 우수한 문화는 하·은·주 삼대를 이어 전해진 문화로 인식되었는데, 당시는 이 문화를 받아들인 주가 붕괴기에 이르렀던 것이다. 역사상으로는 춘추 시대 말기로 곧 구질서가 완전히 붕괴하고 전국 시대가 시작하는 시기였다. 공자는 당시 전통 문화가 비교적 잘 보존된 소국인 노(魯)나라의 산동성 곡부(曲阜)에서 가난한 하급 사족(士族)의 아들로 태어났다. 일찍 아버지를 여읜 공자는 당시 사족의 기초 교양인 육예〔六藝: 예(禮)·악(樂)·사(射)·어(御)·서(書)·수(數)〕를 익혔지만 이에 만족하지 않고 15세 무렵부터 스스로 고급 위정자의 교양인 시·서·예·악의 연구에 뜻을 두었을 뿐 아니라 국가 사회를 이끌어가야 할 군자(君子)의 인간상을 추구하기에 이른다. 그리고 주 건국의 위인인 주공(周公)을 깊이 존경하면서 30세에 이르러 이미 독자적인 학풍을 세운 학자로 인정받았다. 그런데 공자의 학문은 지식과 실천이 분리되지 않았다. 달리 말해 위정자로서 좋은 정치를 실천하는 일과 교양인이자 인격자인 군자로서의 생활을 실천하는 것은 학자로서 해야 할 정치·문화·도덕에 대한 지식의 추구와 분리되지 않는 것이었다. 당연히 그는 몸소 공직을 받아들여 위정자로서 입신하고자 했다. 그러나 당시 노나라의 혼란한 사정과, 여전히 뿌리 깊은 봉건적 신분제도 때문에 그가 바란 취직의 기회는 쉽게 찾아오지 않았다. 결국 오랜 연구와 수양과 구직 시기를 보내고 50세에 이르러 처음으로 노나라의 정공(定公)을 섬길 수 있었다. 중도(中都)의 재(宰)라는 관리에 임용된 것이 공자가 얻은 최초의 공직이다. 그러나 과연 그는 인격과 학식과 수완에서 금세 두각을 나타냈다. 특히 제(齊)나라와의 중요한 외교 교섭인 협곡(夾谷)의 회(會)에 상(相) 신분으로 정공을 수행했을 때 그 임무를 성공리에 마쳐, 그의 수완을 안팎에서 인정받기에 이르렀다. 이로써 공자는 하대부(下大夫)로 발탁되어 국정에 참여하게 된다. 그로부터 2∼3년간이 현직에 있었다고 말하는 의미에서 볼 때 공자의 생애에서 최고로 자랑스러운 시기였다. 그러나 이 시기는 공자의 전 생애에 걸친 사업의 관점에서 보자면 최초의 시련기이자 제일보를 내딛는다는 의미에서 중요한 단계에 지나지 않는다. 진정한 공자의 사업은 이때 비로소 출발했다고 할 수 있다. 하지만 혼란의 시기였던 당시 상황에서 아무리 학식과 덕망이 뛰어났다 하더라도 하급 사족으로서 한계를 느낄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결국 개혁에 실패해 직을 그만두고 타국으로 망명할 수밖에 없었다. 이때가 공자의 나이 55세 무렵이었다. 그로부터 14년간에 걸쳐 북으로는 위나라로부터 남으로는 진(陳)·채(蔡)에 이르기까지 난관으로 가득 찬 방랑의 세월이 전개된다. 이것은 그가 심사숙고 후에 결행한 목숨을 건 행동이었다. 천하 어디서든 자신을 받아주기만 하면 그곳에서 이상을 실현하려고 했지만 이 계획도 모두 실패로 끝난다. 무엇보다 이에 따른 자연스러운 결과로서 그는 직접 천하의 실정을 깊이 인식할 수 있었고, 그의 주의(主義)를 천하에 알리는 계기가 되었다. 특히 여러 번 목숨을 잃을 뻔했지만 그때마다 전향적으로 잘 대처해 굴하지 않았다. 이로써 인생 경험이 더욱 깊어지고 인격이 더욱 고매해졌으며, 사상은 점점 원숙해졌다. 이것은 그의 만년의 교육 사업, 문화 사업에서 비교할 수 없는 빛을 발하는 기초가 되었다. 따라서 이 14년간의 고난에 가득 찬 유력(遊歷) 시대는 공자의 생애에서 위대한 한 시기로 소위 “쉰 살에 천명(天命)을 알았다”는 정권 참여 시대 이후를 이어받는 “예순 살에 귀로 들으면 그대로 이해되었다”(《논어》 〈위정〉편 제4장)고 하는, 고생 끝에 세상 물정에 통달한 공자를 만들어냈다. 공자가 14년에 걸친 천하유력(天下遊歷)을 마치고 노나라로 되돌아온 것은 68∼69세 때다. 불퇴전의 결의를 ... https://www.youtube.com/watch?v=gbb4B7xk96s
파세바카이엔이페트의 관(棺) / 기원전 약 1075~945년
제21왕조에 이르러 이집트의 귀족들은 무덤을 정교하게 만드는것을 중단하였다.
대신 무덤 벽에 그리던 그림을 관에 그렸다. 파세바카이엔이페트의 관에는 여러
신(神)들을 비롯해 그들을 숭배(崇拜)하는 죽은 이의 모습이 그려져 있다.미라 마스크
또한 죽은 이가 오시리스로 표현되어 있다. 관 왼쪽이 일부 손상되었는데
당시 목수들이 작은 나무 조각들을 나무못으로 고정해 관(棺)을 만들었음을
보여 주기 위해 보수(補修)하지 않고 그대로 두었다.
또한 겉면을 석고(石膏)를 바른 뒤에 채색하여 표면을 매끄럽게 만들었다.
미라(mirra)를 만드는 일을 직업(職業)으로 삼는 전문가(專門家)들이 있다.
시신(屍身)이 옮겨지면 가족에게 색칠한 관(棺) 견본을 보여주며 선택하게 한다.
이 중에서 가장 좋은 것은 오시리스 신(神)을 모방한 것이라 말한다.
또 이보다 좀 못하고 값도 싼 두 번째 방법과 가장 싼 세 번째 방법도 보여준다.
- 헤로도토스(Histories)〈역사(The Histories)〉2권 86장 -
국립중앙박물관은 이 전시실을 꾸미기 위해 세계적인 이집트 문화재 소장기관인 미국 뉴욕의 브루클린박물관과 협력했다.
앞서 국립중앙박물관은 2013년부터 브루클린박물관 한국실을 지원해왔고 2016년에는 공동 특별전 '이집트 보물전'을 열었다.
2년 뒤에는 세계 주요 문명(文明) 중에 아직 국내에 제대로 소개된 적이 없는 메소포타미아 문명 전시관이 열릴 예정이다.
메소포타미아 문명 전시관은 미국(美國) 뉴욕 메트로폴리탄 박물관( New York Metropolitan Museum)과 협력할 계획이다.
목차
001. 천지창조와 부활의 신화
002. 영원과 천국의 세계
003. 부활의 염원이 깃들인 파피루스
004. '사자의 서'
출판사 서평
수천 년 역사를 이루어온 고대 문명의 신비 뒤에는 그들의 정신을 이루고 문화의 기저를 형성한 집단의 정신적 모태가 존재하기 마련이다. 세계가 깊은 잠에 빠져 있던 시기에 거대하고 장엄한 태양의 문화로 인류의 문명을 인도한 이집트 역시 예외일 수 없다.
인류 역사상 최고(最古)의 문화를 꽃피웠던 고대 이집트인들의 사상을 지배하고 문화의 원동력이 되었던 것은 부활사상이 담긴 내세관이 있다. 신전의 사제들은 죽은자를 위한 의식과 주문으로 죽은 자를 영원한 삶으로 이끌 수 있다고 믿었으며, 그 신비롭고 방대한 죽음과 부활의 내세관이 담긴 비서(珌書) [사자(死者)의 서(書)]가 탄생하기에 이르렀다. 때문에 '사자의 서'는 어느 한 사람이 기록한 것도 아니고 어느 한 시대에 씌어진 것도 아니다.
'사자의 서'는 이집트 왕조가 성립되기 이전, 문자가 발명되지 않은 구전의 시기부터, 알렉산더 대제에 의해 이집트 왕국이 멸망한 후 성립된 프톨레미 시대까지 약 삼천 년에 걸쳐 기록된 것이다. 이후 수많은 이집트 학자들의 연구와 해석에 힘입어 오늘날의 우리는 전설적인 오천 년 전의 문화를 접하게 된 것이다.
이번에 국내 최초로 '사자의 서'를 온전한 모습으로 소개하는 귀중한 계기를 마련하고자, 문학동네에서 [이집트 사자의 서]를 발간하게 되었다. 이집트학의 여명을 여는 데 기여했던 대영박물관 이집트학 실장이었던 윌리스 벗지, 독일 학자 렙시우스, 그리고 최근에 포크너가 편찬한 것을 기초로 서규석씨가 재구성하였으며, 일반인들이 최대한 이해하기 쉽도록 꾸며져 있다.
또한 이집트 신화는 고대 그리스의 역사가 플루타크가 쓴 '이시스와 오시리스'를 참고로 했으며, '사자의 서'를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되도록 이집트의 개벽 신화와 종교를 전편에 도입하였다. 아울러 여러 학자들이 해독 내지 해석한 내용과 삽화를 많이 담고자 노력했다. 이 책을 통해서 우리는 고대 이집트인들의 삶과 죽음의 의식, 이집트 문명의 정신적 모태를 추적하는 신비로운 체험을 하게 될 것이다
국립중앙박물관 세계문화관 이집트실에서 전시중인 미국 브루클린박물관 소장 유물 ‘파세바카이엔이페트의 관’(사진=국립중앙박물관)
이집트실은 2019년 12월에 조성된 국내 최초의 이집트 상설전시실로, 미국 브루클린박물관이 소장한 이집트 문화재 94건을 약 2년간 전시하기로 예정돼 있었다.
이집트실은 ‘삶, 죽음, 부활의 이야기’라는 주제로 이집트의 장구한 역사와 독특한 세계관을 소개하고 있다.
세계의 다양한 문화를 언제든 쉽게, 무료로 관람할 수 있도록 마련한 전시였지만 코로나19의 확산을 막기 위한 정부 방역 지침에 따라 박물관이 2020년에 4차례 휴관하면서 관람을 원하는 사람들이 전시를 찾을 수 있는 충분한 시간이 주어지지 못해 아쉬움이 컸다.
이에 박물관은 소장처인 브루클린박물관과 공유하고 전시기간을 약 4개월(114일) 연장하는 데 최근 합의했다.
이집트실은 상설전시관 3층에 위치하고 있어 상설전시관 관람을 예약하여 입장하면 별도의 절차 없이 자유롭게 관람할 수 있다. 입장료는 무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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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www.youtube.com/watch?v=qn6auV6NvCU