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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BRY Claims • 기무라-에이이치,-공자와-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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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reated On
19 Sep 2022 15:05:31 UT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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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afe for Work
Free
Yes
기무라 에이이치, 공자와 논어, 취직, 관중, 사기, 안자춘추, 맹자, 안영, 이문, 서록, 교섭, 비유,증삼, 직하, 유자, 자공, 예문지, 고론, 노론, 노나라, 유세, 제론
기무라 에이이치
1906~1981
일본의 중국 철학자다. 교토에서 태어났으며, 1930년 교토제국대학(京都帝國大學) 문학부 중국철학사학과를 졸업했다. 1960년 〈노자의 새로운 연구〉로 박사 학위를 받았다. 교토대학 조교수를 거쳐 1949년부터 오사카대학(大阪大學) 문학부에서 학생을 가르쳤으며, 1967년 정년퇴임 후 명예교수를 지냈다. 오테몬가쿠인대학(追手門學院大學) 교수를 역임하기도 했다.
제6절 〈옹야〉편의 성격과 구조
제7절 〈술이〉편의 성격과 구조
제8절 〈태백〉편의 성격과 구조
제9절 〈자한〉편의 성격과 구조
제10절 〈향당〉편의 성격과 구조
제11절 〈선진〉편의 성격과 구조
제12절 〈안연〉편의 성격과 구조
제13절 〈자로〉편의 성격과 구조
제14절 〈헌문〉편의 성격과 구조
제15절 〈위령공〉편의 성격과 구조
제16절 〈계씨〉편의 성격과 구조
제17절 〈양화〉편의 성격과 구조
제18절 〈미자〉편의 성격과 구조
제19절 〈자장〉편의 성격과 구조
제20절 〈요왈〉편의 성격과 구조
제5장 《논어》의 편집

한글 번역본 참고문헌
옮긴이의 글
찾아보기
출판사 서평
이 책은 크게 공자의 전기와 《논어》를 다루고 있다. 다시 말해 중국 사상사와 문화사 연구에서 공자의 존재를 무시할 수 없다면, 공자의 언행록인 《논어》를 깊이 연구해 밝힐 필요가 있다는 의미일 것이다. 따라서 이 책에서 다루는 공자의 생애와 《논어》의 내용을 개관해보려 한다.

공자의 전기

공자는 지금으로부터 약 2500년 전인 기원전 6세기에서 기원전 5세기에 걸쳐서 73~74세의 생애를 살았다. 당시 중국은 고대 봉건 국가인 주(周)왕국이 붕괴하던 시기로 이른바 춘추 시대 말기에 해당한다. 즉 공자 시대에 중국 전통의 우수한 문화는 하·은·주 삼대를 이어 전해진 문화로 인식되었는데, 당시는 이 문화를 받아들인 주가 붕괴기에 이르렀던 것이다. 역사상으로는 춘추 시대 말기로 곧 구질서가 완전히 붕괴하고 전국 시대가 시작하는 시기였다.
공자는 당시 전통 문화가 비교적 잘 보존된 소국인 노(魯)나라의 산동성 곡부(曲阜)에서 가난한 하급 사족(士族)의 아들로 태어났다. 일찍 아버지를 여읜 공자는 당시 사족의 기초 교양인 육예〔六藝: 예(禮)·악(樂)·사(射)·어(御)·서(書)·수(數)〕를 익혔지만 이에 만족하지 않고 15세 무렵부터 스스로 고급 위정자의 교양인 시·서·예·악의 연구에 뜻을 두었을 뿐 아니라 국가 사회를 이끌어가야 할 군자(君子)의 인간상을 추구하기에 이른다. 그리고 주 건국의 위인인 주공(周公)을 깊이 존경하면서 30세에 이르러 이미 독자적인 학풍을 세운 학자로 인정받았다. 그런데 공자의 학문은 지식과 실천이 분리되지 않았다. 달리 말해 위정자로서 좋은 정치를 실천하는 일과 교양인이자 인격자인 군자로서의 생활을 실천하는 것은 학자로서 해야 할 정치·문화·도덕에 대한 지식의 추구와 분리되지 않는 것이었다. 당연히 그는 몸소 공직을 받아들여 위정자로서 입신하고자 했다. 그러나 당시 노나라의 혼란한 사정과, 여전히 뿌리 깊은 봉건적 신분제도 때문에 그가 바란 취직의 기회는 쉽게 찾아오지 않았다. 결국 오랜 연구와 수양과 구직 시기를 보내고 50세에 이르러 처음으로 노나라의 정공(定公)을 섬길 수 있었다. 중도(中都)의 재(宰)라는 관리에 임용된 것이 공자가 얻은 최초의 공직이다. 그러나 과연 그는 인격과 학식과 수완에서 금세 두각을 나타냈다. 특히 제(齊)나라와의 중요한 외교 교섭인 협곡(夾谷)의 회(會)에 상(相) 신분으로 정공을 수행했을 때 그 임무를 성공리에 마쳐, 그의 수완을 안팎에서 인정받기에 이르렀다. 이로써 공자는 하대부(下大夫)로 발탁되어 국정에 참여하게 된다. 그로부터 2∼3년간이 현직에 있었다고 말하는 의미에서 볼 때 공자의 생애에서 최고로 자랑스러운 시기였다. 그러나 이 시기는 공자의 전 생애에 걸친 사업의 관점에서 보자면 최초의 시련기이자 제일보를 내딛는다는 의미에서 중요한 단계에 지나지 않는다. 진정한 공자의 사업은 이때 비로소 출발했다고 할 수 있다.
하지만 혼란의 시기였던 당시 상황에서 아무리 학식과 덕망이 뛰어났다 하더라도 하급 사족으로서 한계를 느낄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결국 개혁에 실패해 직을 그만두고 타국으로 망명할 수밖에 없었다. 이때가 공자의 나이 55세 무렵이었다. 그로부터 14년간에 걸쳐 북으로는 위나라로부터 남으로는 진(陳)·채(蔡)에 이르기까지 난관으로 가득 찬 방랑의 세월이 전개된다. 이것은 그가 심사숙고 후에 결행한 목숨을 건 행동이었다. 천하 어디서든 자신을 받아주기만 하면 그곳에서 이상을 실현하려고 했지만 이 계획도 모두 실패로 끝난다. 무엇보다 이에 따른 자연스러운 결과로서 그는 직접 천하의 실정을 깊이 인식할 수 있었고, 그의 주의(主義)를 천하에 알리는 계기가 되었다. 특히 여러 번 목숨을 잃을 뻔했지만 그때마다 전향적으로 잘 대처해 굴하지 않았다. 이로써 인생 경험이 더욱 깊어지고 인격이 더욱 고매해졌으며, 사상은 점점 원숙해졌다. 이것은 그의 만년의 교육 사업, 문화 사업에서 비교할 수 없는 빛을 발하는 기초가 되었다. 따라서 이 14년간의 고난에 가득 찬 유력(遊歷) 시대는 공자의 생애에서 위대한 한 시기로 소위 “쉰 살에 천명(天命)을 알았다”는 정권 참여 시대 이후를 이어받는 “예순 살에 귀로 들으면 그대로 이해되었다”(《논어》 〈위정〉편 제4장)고 하는, 고생 끝에 세상 물정에 통달한 공자를 만들어냈다.
공자가 14년에 걸친 천하유력(天下遊歷)을 마치고 노나라로 되돌아온 것은 68∼69세 때다. 불퇴전의 결의를
...
https://www.youtube.com/watch?v=gbb4B7xk96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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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ntent Type
Unspecified
video/mp4
Language
Open in LB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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