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시 탄금대 전투에 대한 조선과 일본의 기록들을 종합해보면,
신립은 왜군을 충주의 넓은 들판으로 끌어들여서
활을 잘 쏘고 말 잘 타는 서울 한량들로 구성된 궁기병 8000(전부 비정규군)으로 활을 쏘며 돌진시켜 보병 뿐인 왜군을 짓밟으려 했다.
신립은 자신이 승리할 것을 믿어 의심치 않았다.
그리고 신립은 자신이 직속으로 항상 거느리고 다니는 정예 철기 500명의
돌파력에 많은 기대를 걸었다.
이들은 북방의 여진족들의 간담을 서늘하게 하던 조선의 개마무사들이다.
4월 28일 오후 결전의 날
단월역 언덕에서 창날을 햇빛에 번쩍이며 진군해오는 일본군 장창병대를 보고
조선 보초병들은 전율하며 덜덜 떨었다.
하지만 신립은 한량 8천이 거느린 개인노비(대략 2만 4천)와
충주 군현 병사와 읍민 대략 2만명 그리고 경상도에서 왜군을 피해 문경,조령을 거쳐 충주로 피난온 경상도 피난민들 대략 수천
이들을 전부 탄금대에 배치시켜 마치 6만의 대병력이 결집한 것처럼 꾸미고
허수아비들을 더 배치시켜 7만~8만이나 되는 것처럼 허장성세를 보이며 역으로 왜군을 벌벌 떨게 했다.
신립은 왜군이 벌벌 떨며 단월역 언덕 앞에서 더 전진하지 않는 것을 보고
승리를 확신하며 한량들에게 전원 출격을 명령한다.
한량들은 출격하지만 탄금대 앞은 남북 5km로 논밭과 풀들이 무성한 늪지가 많아서 말들의 빠른 이동력이 다소 떨어졌다.
그 사이 충주에 이미 몰래 도착해있던 일본군 조총병 2부대가 포복 전진을 하며 조선 한량들의 좌,우를 포위하여왔다.
한량들이 일본군 장창 부대와 마주치자
사방에서 조총병들이 나타나 조총을 인정사정없이 발사해대 천지가 진동했다.
당시 기록들에 따르면 고니시 유키나가가 이끄는 일본군은 단월역 언덕에 도착했다.
상촌집과 장양공 이일의 문집을 보면
신립의 한량 부대 8천을 거느린 선봉장 이일은 단월역에서 일본군과 첫 접전을 벌였다.
이 첫 접전 때 일본군의 또 다른 부대(조총 부대)은 동쪽으로 산을 따라 불쑥 나오고
그리고 또 다른 부대(역시 조총 부대)가 강변을 따라 불쑥 나와
조선군의 좌,우를 조총 포화 사격으로 퍼붓고 동시에 배후를 포위하여 오는 전술로
조선군을 혼란에 빠뜨렸다.
한량들은 많은 사상자를 내고 후퇴한 후 전열을 가다듬고 다시 진격하기를 2~3차례 반복하지만
이미 단월역에서 일본군의 예봉을 격파하는데 실패하여 달천평야의 논밭 뻘지대로 밀려나버린
조선군은 이미 불리한 형세에 처해져버렸다.
왜군은 그런 조선군을 빽빽히 포위해오며 총을 사정없이 쏘는 동시에
괴성을 지르며 2m 길이의 긴 칼을 이용한 반자이 부대의 공격으로 한량들의 사기를 완전히 0으로 만들어
결국 한량들은 나 살려라하고 탄금대로 도망친다.
왜군은 텅텅 빈 충주성을 손쉽게 접수하고
그 후 왜군은 탄금대를 포위해 맹공을 퍼부었다.
탄금대의 조선인 6만명은 차디찬 강물로 몸은 던져 전부 익사하고
익사자들의 시신들이 가득 쌓여 강물의 흐름이 꽉 막혀버렸다.
신립 장군과 한량나이트 8000의 탄금대 전투 3D 시뮬레이션 고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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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www.youtube.com/watch?v=Lkd2pWf1Zuo